블라드 체페슈, 질 드 레 등과 함께 흡혈귀의 원형으로 알려져 있으며, 팜 파탈의 시초쯤 되는 인물. 보통 영어식 표기인 엘리자베스 바토리로 알려져 있으나, 헝가리어 표기는 바토리 에르제베트이다.
바토리 남작, 또는 바토리 부인이라고 알려진 이 인물은 1560년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던 바토리가의 딸로 태어났다. 이 시기 바토리가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의 왕인 바토리 이슈트반의 가문으로서 헝가리와 폴란드 일대에서 가장 막강한 가문 중 하나였고, 그 자신이 바토리 이슈트반의 조카였다.
젊은 시절에는 조신한데다가 상당한 미인으로 알려졌으며 궁중의 예법을 배워 현모양처에 가까운 이미지였다. 1575년 그녀는 15세에 결혼을 하였는데 하객으로 4500명이 참석하는 규모를 과시하였다.
그러나 남편은 주로 전쟁터에서 지휘하는 임무를 맡았으므로 결혼 생활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남편은 1578년 헝가리 군대의 총사령관을 맡는 등 막중한 임무를 주로 수행하였고 바토리는 거대한 성의 여주인으로 남아 성과 주변 마을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1593년부터 1606년에 이어진 전쟁에서 그녀가 머무는 영지는 오스만 군대의 침략에 노출되었는데 이때 성을 방어하는 데에도 바토리가 어느 정도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때 그녀는 미망인, 전쟁포로의 부인, 그리고 강간의 피해자 여성들을 대표해 사절을 주고받는 일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585년 1597년까지 그녀는 6명을 자녀를 낳는다. 그 뒤 남편이 1604년 47세의 나이로 전사하자 44세의 바토리는 성의 유일한 주인이 된다.
그 뒤 나이를 먹고 자신의 피부가 점점 노화되는 걸 두려워하여 성격이 점점 신경질적으로 변해간 듯하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머리를 빗기는 하녀가 실수로 머리를 좀 심하게 잡아당긴 것에 화가 나서 하녀의 뺨을 때린 것이 인생을 바꿔놓았다.
이때 마침 끼고 있던 반지 때문에 하녀의 뺨이 긁혀서 피가 튀었고, 나중에 바토리는 이 피를 닦았으나 피가 튀었던 곳의 피부가 평소보다 좀 더 하얗게 보여서, 이후 처녀의 생피가 자신의 노화를 막고 젊음을 되찾게 해주는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쨌든 결국 그녀는 근처 농민들의 딸들을 유괴하여 피를 짜내기에 이르렀는데, 그 방식은 기절한 처녀를 철새장에 가두어 그것을 천장에 매단 다음,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가시에 찔리도록 장치해 두고 처녀가 깨어나서 몸을 움직이면 새장이 흔들리면서 자연히 가시에 찔리게 되고, 통증을 못 이겨 몸을 더 심하게 움직이면 다른 가시에 더 찔리게 되다가 결국 기력이 빠져 죽게 만드는 악랄한 방식을 사용했으며, 바토리 본인은 그 밑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샤워를 했다.
처음에는 샤워하고 남은 시체를 신부를 불러다가 정식으로 장례를 치렀는데, 시간이 갈수록 시체가 점점 많아지고 죽은 사람의 숫자도 많아져 신부가 장례를 거부하는 등 장례 의식마저도 여의찮아지자 아무데나 갖다버리게 되었다고 한다. 바토리 자신이 쓴 일기를 토대로 사망자를 추산해 보면 이 수는 총 612명이라고. 나중에는 평민의 피로는 만족을 못했는지 귀족의 딸들도 노리게 되는데, 귀족적 소양을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귀족 여학교를 설립하고 귀족을 한번에 25명씩 받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희생자들 중 한 명이 극적으로 탈출하여 신고함으로써 내막이 드러난다.
1611년 재판을 받았지만 본인은 귀족이라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그녀의 측근과 하녀들은 전원 사형에 처해진 반면, 그 시대의 법률로 귀족은 처벌받지 않았기 때문에 사형에 처해지지는 않고 일종의 무기 금고형에 처해졌는데 그게 여생을 식사를 넣어 주는 구멍 외에는 모든 것이 밀폐되고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탑 안에 갇혀 있는 것. 그 안에서 지내다가 결국 1614년 사망했다고 한다.
후대에는 그녀의 정적들이 재산을 가로채기 위해 약점을 드러내는 모함이라고 주장하는 설도 나오고 있다. 물론 그녀가 살인을 했을 수도 있겠지만 16세기 초부터 귀부인들을 습격-모함하여 마녀로 몰아 죽이는 형식의 일들이 빈번하게 등장한 시기였기에 이 주장도 간단하게 묵살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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