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술(占術)의 한 형태.
개인·집단·국가의 운명을 예고하거나 그것에 영향을 줄 목적으로 행성과 별이 지상의 사건에 끼치는 영향을 해석한다. 때로는 과학으로 간주되었으며, 고대와 현대를 막론하고 여러 문명에 광범위하거나 지엽적인 영향을 끼쳐왔다. 거짓 학문으로 규정되어오기도 했고, 현대 과학의 이론과 발견에 정반대되는 것으로 간주되어오기도 했다.
점성술은 BC 3000년경에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되었으나 훨씬 후대인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문명권에 해당하는 서양 세계에서 꽃을 피웠고, 고대 메소포타미아 형태로 인도에 전파되었다. 이슬람 문화는 그리스 유산의 일부로 점성술을 흡수했으며, 서유럽이 이슬람 과학에 강한 영향을 받던 중세시대에는 유럽의 점성술도 동양의 영향을 받았다.
이집트인도 간접적으로 점성술의 발전에 공헌했다. 이들은 12개월을 각각 30일로 하고 연말에 5일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달력을 만들었고, 훗날 그리스인은 이 달력을 받아들여 천체 관측을 위한 표준으로 삼았다. 이집트인은 별이 총총한 하늘을 시계로 이용하기 위해서 10일 간격으로 뜨는 밝은 별 36개를 선정했고, 각각의 별(라틴 작가들은 이 별들을 ' 데칸'이라고 불렀음)이 각각의 시간을 주관하는 영(靈)으로 생각했다. 훗날 이 별들은 12개의 상징들로 세분된 12궁도(十二宮圖)에 들어갔다.
제국시대 이전의 중국에서는 인식 가능한 우주질서에 대한 신앙, 곧 인식된 사물의 양상으로부터 아직 인식되지 않은 연관된 양상을 추론할 수 있다는 이 신앙에 근거하여 자연현상을 인간의 활동 및 운명과 나란히 놓는 관계 도표들을 발전시켰다. 별들이 인간사에 직접 영향을 준다는 점성술 신앙으로 옮겨가는 속도는 더디었지만, 여기서 수많은 관찰체계와 지식 전승이 발달했다. 서양의 천문학과 점성술이 몽골 시대에 아라비아의 영향을 받아 중국에 전래되었을 때 그 자료들이 중국 점성술 체계에 통합되었다. 훗날 제국시대의 중국에서는 수세기 동안 아기가 태어날 때나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천궁도를 가지고 점을 치는 것이 보편적인 관습이었다.
점성술의 인과관계 개념은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 확립된 뒤 모든 학문, 특히 의학 및 관련 학과에도 침투해 들어갔다. 소우주인 인간과 대우주인 자연을 연결하는 우주의 '조화'에 관한 교리를 신봉한 스토아 학파는 점성술에서 그러한 우주의 실제적인 지도를 발견했다. 그리스 점성술은 독자적인 점술 방법을 가지고 있던 로마인에 의해서 천천히 흡수되었으나,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이르러서는 원래 갖고 있던 왕의 대권을 다시 차지했다. 그러나 그 영향력을 대중에게 접목시키려는 시도는 거듭 실패했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천문학과 점성술이 같은 뜻으로 쓰였으나, 그리스도교의 처음 몇 세기에는 별에 관한 과학인 천문학과 별을 사용하여 점을 치는 기술인 점성술 사이의 현대적인 구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스도교는 별의 전능을 부정하고 그 별을 만든 창조주의 전능을 가르쳤고, 점성술의 결정론에 대해서 의지의 자유를 내세워 반박했으나, 이러한 범위 안에서 점성술의 세계관을 받아들였다. 이것을 부정했다면 그리스도교는 점성술의 관점을 지녔던 고전 문화의 유산 전체를 배척하고 말았을 것이다. 심지어 그리스도교 역사의 중심에서조차 페르시아의 마구스(점성술사:〈신약성서〉에서는 동방박사)들이 천상의 징조를 따라 예수가 탄생한 곳으로 왔다고 전한다. 여러 그리스도교 공의회가 점성술을 단죄했지만, 점성술이 함축하고 있는 세계관에 대한 신앙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중세말에는 파리·파도바·볼로냐·피렌체 등지의 대학교가 점성술을 정식과목으로 채택했다. 인문주의자들이 고전학을 부활시키면서 점성술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졌고 르네상스와 심지어 종교개혁을 거치면서도 지속되었다.
16세기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은 지구 중심의 세계관을 유지해오던 점성술에 일대 타격을 가했다. 그러나 점성술은 오락과 미신으로 오늘날까지 지속되면서 수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어왔으며, 20세기에는 일간신문의 고정란에 실리는 기사와 특별 역서(曆書)들, 점성술의 여러 측면에 관한 안내서가 그 재미를 충족시켜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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