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신파는 8세기 무렵부터 그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지만 실질적인 이 종파의 창시자는 오늘날의 이란에서 태어난 전설적인 지도자 하산 사바흐(?~1124)로 알려져 있다. 하산은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에서 일하다가 포교사가 되어 돌아온 다음 1090년 이란 북부의 다이람 산맥에 있는 알라무트라는 견고한 산성을 손에 넣어 그곳에서 강력한 집단공동체를 세우고 세력을 키웠다. 이 산성은 ‘매의 둥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카스피 해를 북쪽으로 두고 서남쪽에 바그다드가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하산의 목표는 압바스 정권의 중요한 인물에 대한 암살을 통해 압바스 왕조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마르코 폴로는 자신의 저서 동방견문록에서 이 지방을 아래와 같이 설명하였다.
『그는 산속의 계곡을 사들여서 지금까지 어디서도 볼 수 없었을 정도로 크고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어 여러 가지 과일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누각과 궁전을 세웠다. 모든 건물에는 금박을 입히고 밝고 선명한 색을 칠했다. 몇 갈래의 강줄기에는 포도주, 우유, 꿀, 물이 각각 넘치도록 흐르고 있었다. 묘령의 미녀들이 악기를 연주하며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며 예쁘게 춤추고 있었다.
무함마드가 말하기를 낙원에는 포도주나 우유, 꿀, 물이 흐르는 배수로가 있으며 낙원에 들어오는 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해 많은 미녀들이 살고 있다고 했는데, 산장로는 이 말을 토대로 해서 정원을 만들었고 이 지방의 무슬림들은 이곳이야말로 낙원이라고 믿었다.
산장로가 만든 이 정원에는 오직 하나의 입구가 있는데, 그곳에는 견고한 요새가 있었다. 즉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정원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사람이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선발되는 사람은 대개가 무술을 좋아하고 신체 건강한 열두 살에서 스무 살까지의 소년이다. 그리고 알라에 대한 믿음이 강해야 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동방견문록-
철저한 통제와 비밀 속에서 조직 운영을 했던 아사신들은 엄격한 규율과 훈련을 통해 소수 정예의 암살자들을 양성했고 이렇게 훈련된 암살자들은 상부의 명령에는 그 어떤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무조건 복종하였다고 전해진다. 거점을 확보하면서 교단의 지론인 절대적 권위에 대한 헌신, 종파상의 적대자를 말살한다는 교단의 독특한 성격이 매우 조직적으로 정비되어갔다. 그들은 차례차례 거미줄처럼 거점을 두루 세우고 그 지역에서 정력적으로 암살 활동을 전개했다. 암살자들은 단검을 절묘하게 사용하여 매우 잔혹하게 목적을 실행했다. 그 ‘암살 기술’은 상당히 수준이 높았고 독특하고 숙련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이 암살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들 가운데 유명인사들을 다음과 같다. (물론 암살단의 성격상 이들의 암살자가 아사신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은 경우도 많음)
셀주크 와지르 니잠 알 물크 (1092년)
파티마 와지르 알 아프달 (1122년)
아부 하라위 (1123년)
알레포의 이븐 알 카샤브 (1124년)
트리폴리의 레몽 2세 (1152년)
몬페라토의 코라도 (1192년)
♣알라무트의 공격
또한 유명한 이슬람의 영웅 살라흐 앗 딘(살라딘)도 수차례 아사신의 공격을 받았으나 목숨을 건졌다. 특히 아사신 쪽의 전승이 전하는 바로는 1176년 8월 살라흐 앗 딘이 아사신파에 대한 시리아 근거지에 대한 소탕 작전을 펼칠 때, 시리아의 아사신파의 지도자 라시드 앗 딘은 몰래 살라딘의 침소에 들어가 독이 든 과자와 “너는 우리 손안에 있다.”라고 적힌 쪽지를 살라딘에게 전했고 그 후로 살라딘은 아사신파를 공격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각지에서 소위 ‘신비적인 암살’이 잇달아 일어났고 이슬람 세계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당시 셀주크 왕조의 왕이었던 세말리크샤 1도 아사신 징벌을 위해 군대를 알라무트 산성으로 출격시켰지만 아사신들은 견고한 천연 요새를 무기로 농성 작전을 전개했다. 더구나 몇 번에 걸쳐 야간에 반격을 가해서 끝내 호위군을 격파했던 것이다.
그 후에도 수차례에 걸쳐서 칼리파나 술탄들의 공격을 받았지만 아사신 측의 수비는 완벽했다고 한다. 힘을 얻은 아사신은 시리아에도 근거지를 만들어 당시의 술탄을 자기들의 파로 개종시키는 등 세력을 확장했다.
아사신은 이슬람을 위해서만 암살을 수행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레반트의 십자군들과도 종종 연합했고 심지어 병원기사단의 사주를 받고 예루살렘 총대주교를 암살하기도 했다. 또한 코라도의 암살은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의 사주로 아사신파가 행한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아사신파는 13세기 몽골족의 훌라구 칸에 의해 괴멸된다. 훌라구 몽골군이 페르시아 제국의 아사신파 요새들을 차례로 점령하고, 1256년12월 5일 마침내 아사신의 근거지인 알라무트를 함락시켰다. 이 때의 공격으로 아사신파의 유서깊은 도서관이 불에 타서 아사신파에 대해 알 수 있는 경전, 기록, 외교문서 등 수많은 자료가 소실되었다. 또한 1273년 시리아에 거점을 둔 교단도 맘루크 왕조의 술탄 바이바르스에 의해 차례로 소탕되었다. 이후 아사신파는 극소수 이단으로 몰려 시리아 북부나 페르시아 등지로 뿔뿔이 흩어졌고 그 때문에 이 교단의 실체는 점차 전설화되고 미화 또는 격하되어 그 실체는 베일에 가려지게 되었다.
현재 그들의 후예라고 알려져 있는 것은 인도에 본거지를 둔 이스마일파의 교단장 아가 칸(Aga Khan)이다. 그는 지금도 시리아의 신도들로부터 징수하는 10분의 1세 등의 권리를 가지고 파리나 런던에서 화려한 생활을 즐기고 있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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