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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8장 - "중세 초중기의 로마 가톨릭 교회"
AD 樂지운영자  
그리스도교의 3대 주요교과 가운데 하나.

♣1000년까지의 교회
중앙집권 체제이던 그리스도교의 상당부분이 11세기 무렵에 와서는 주교관구와 개별적인 관구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중세기에는 대학과 '가톨릭'의 학문이 융성했는데, 이상하게도 그것은 아라비아 학자들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이 전해진 데서 비롯되었다. 중세의 대가들에 의해 고도의 형식을 갖춘 철학적·신학적 체계인 스콜라주의는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로마 가톨릭 사상을 지배했으며, 유럽의 지적인 전통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중세기에는 수도원제도가 발전했다. 세상으로부터의 은둔은 그리스도교와 로마 문명의 갈등에 대한 한 대응으로 볼 수도 있다. 중세 초기의 교육은 대학과 수도원에서 이루어졌다. 대성당 부설학교가 거의 없었으며, 시골에서는 라틴어를 제대로 해독할 수 있었던 신부도 드물었다. 지방에서는 경건한 종교 의식과 신앙이 종종 미신이나 선의(善意)의 마술 행위와 융합되기도 했으며, 신부의 입회 없이도 적법한 결혼으로 인정되었던 그 당시의 결혼관습은 결혼을 금지한 촌수가 복잡했으므로 더불어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켰다.
 
♣첫 개혁가들인 레오 9세와 니콜라우스 2세
레오 9세(1049~54 재위)는 교회 전반에 걸쳐 교황의 권위를 강조한 첫번째 교황이었다. 그는 교황직에 보편적 의의를 다시 부여했고 수위권을 강조했다. 또한 교황의 자문위원회인 추기경단에 비(非)로마인들을 임명하고, 교황의 교령을 실행하도록 교황사절을 파견하는 관례를 만들었다. 그는 왕성한 활동력과 분명한 영적 목표를 지녔지만, 노르만족과의 싸움에서 참패를 당하고 자신도 포로가 되었던 전쟁에 대한 책임과 1054년 완고하고 광포한 훔베르트를 콘스탄티노플에 교황사절로 파견하여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의 불화를 일으켜 결국 동·서 교회가 분열된 데 대한 책임은 모면할 수 없었다.
니콜라우스 2세(1058~61 재위)는 짧은 교황 재위 기간에 교회 내부 개혁을 촉진시키고 교황권을 강화했다는 중요 업적을 남겼다. 그는 교황선거가 추기경들의 선출에 의할 것을 규정한 '교황 선거령'을 발표하여(1059) 세속권력의 개입과 간섭을 배제하고 교황의 권위를 높였다. 그는 힐데브란트(후에 그레고리우스 7세)의 보좌를 받아 교회 개혁에 노력했고, 노르만의 세력과 결탁하여 황제에 대항하는 체제를 정비했다.
 
♣그레고리우스 7세의 치세
그레고리우스 7세(1073~85 재위)는 그의 가계에서 가장 탁월한 인물로서 당대 어느 누구보다도 교회의 중앙집권화 등 교회의 외적 조직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개혁을 매우 성공적으로 수행한 교황이었다. 그레고리우스 개혁의 목표는 '교회의 자유'였으며 교회를 세속 권력자들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에서부터 출발했다. 그는 교회와 수도회가 왕후와 귀족에 의해 양도되는 것, 속인(俗人)에 의한 임직(任職), 성직매매를 공격했다. 또한 교회의 자주성을 보장하기 위해 자유로운 선거권 회복 등 교회 고유 권한의 회복을 요구했다. 따라서 자연히 정치권력과의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모든 영혼을 위해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부여한 무제한적 임무(마태 16:18~19)를 계승한 후계자라고 공언했다. 그의 이러한 강력한 주장에는 가장 영향력있는 측근들(이들은 가장 비옥한 봉토를 소유했음)을 관직에 임명하는 전통적인 교황의 권리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것과 옛 교회법과 교황교서의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레고리우스는 비록 고독한 유형지에서 생을 마쳤지만, 그의 개혁 원리는 전유럽에 걸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십자군 운동
십자군운동은 그레고리우스 개혁을 통해 각성되었던 유럽의 새로운 그리스도교 공동체 의식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한 기사적(騎士的)인 충동이 강력히 작용하고 있어서, 때때로 비그리스도교적인 유혈 사태를 불러일으키고, 중세의 난폭한 사건들을 유발시켰다. 유럽의 기사도는 성지 탈환 및 이슬람교에 대한 투쟁을 그리스도교 전파를 위한 것으로 파악했다. 투르크인의 예루살렘 정복(1071)과 그들의 갖가지 방해에 대한 순례자들의 불평은 그리스도교적 양심에 대한 호소 같은 인상을 주었다. 더욱이 콘스탄티노플의 세력 팽창을 통제할 필요성이 절실해지고, 황제 알렉시우스 1세(1081~1118)가 로마 교회에 간절하게 도움을 호소했을 때, 교황 우르바누스 2세(1088~99 재위)는 1095년 클레르몽(프랑스) 교회회의에서 라틴 그리스도교계에 호소했고, 그 결과 대규모의 자원군대가 형성되었으며 교황이 그 수장(首長)이 되었다. 6차례에 걸친 원정에서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1099) 팔레스타인에 라틴 제국을 건설했으며, 교황의 지위가 크게 향상되었다. 그러나 2세기 동안의 십자군 원정은 결과적으로 교황권에 정신적·재정적 부담을 가중시켜 교황권력의 쇠퇴를 가져왔다.

[참조]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락지 기획팀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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