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프랑스·네덜란드 앞바다의 해적.
17세기 후반 동안 주로 카리브 해와 남아메리카의 태평양 연안에 출몰하면서 스페인 정착지와 선박들을 약탈했다.
전성기에는 보통 사략선원(私掠船員)이라 불렸다.
버커니어라는 단어는 네덜란드인 알렉산데르 에스쾨멜린(또는 엑스쾨멜린)이 쓴 〈미국의 해적들 De Americaensche zee-rovers〉의 영어 번역판이 1684년 출판된 뒤부터 사용되었는데 이 책에는 버커니어에 대한 이야기 자료가 풍부했다.
버커니어라는 용어는 훈육용 나무석쇠인 부캉에서 유래하는데, 말린 고기를 이 석쇠에서 훈제해 항해 동안 사용한다. 프랑스에서는 버커니어를 플리뷔스티에, 네덜란드에서는 제로베르, 스페인에서는 코르사리오라고 불렀다. 초기의 버커니어들은 17세기 초반 서부 히스파니올라(아이티)에서 활동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토르투가 섬으로 세력을 확대했는데, 그 섬의 프랑스인 통치자들은 이들을 스페인 상선에 대한 공격에 고용했다. 1655년 영국에 점령된 자메이카 또한 이들의 기지가 되었다.
초기의 버커니어들은 탈출 노예, 전직 군인, 캄페체 해안(지금의 멕시코 남부에 있음)에서 온 도벌꾼 등이었다. 그들은 '해적사업'을 하지 않을 때는 민주적인 규율 속에서 생활했는데 대장을 뽑고, 반항자들을 유배시켰으며, 약탈한 물건을 공평하게 분배하고, 부상한 사람을 위한 세심한 보장제도를 입안했다. 이들은 윌리엄 댐피어, 라이오넬 웨퍼, 바실 링그로스와 같이 뛰어난 사람들을 자신들의 사회로 끌어오게 된 이후, 그들의 공적으로 인정받은 것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다음 세대들에게 미쳤는데 이 지도자들은 모험적인 항해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책으로 써냈다.
버커니어들이 갖는 역사적인 중요성은 주로 이들이 파나마 지협의 다리엔에 스코틀랜드의 식민지 건설을 좌절(1698)시켰다는 것과 남해(南海)회사 설립에 영향을 미쳤다는 데 있다. 또한 저작을 통해 본격적인 태평양 탐험에 나서도록 사람들을 자극한 점도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조너선 스위프트, 다니엘 데포,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같은 중요한 작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자칭 이들 해안의 형제들을 결속시켜준 주된 연결고리는 당시 카리브 해와 남태평양 해로를 그들의 독점물로 간주하고 있던 스페인에 대한 적대감이었다.
버커니어들은 주로 16세기의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 같은 항해가를 본보기로 삼았지만, 이들의 임무가 대부분 비합법적인 것이었다는 점에서 순수한 사략선원과 구별된다. 또한 그들의 활동 중 많은 부분이 해적활동이었다고 할 수는 있지만 그들은 18세기의 무법적인 해적들과도 구별되어야 한다. 최초의 버커니어들은 롤로네(장 다비드 노)나 브라질에서 살았던 네덜란드인 로크 브라질리아노와 같이 가명을 쓰면서 활동했다. 뛰어난 지도자 헨리 모건이 등장하면서 그들은 스스로를 강력한 집단으로 조직하기 시작해 1668년에는 포르토벨로를, 1671년에는 파나마를 점령했다. 그러나 그 지역에 대한 영국과 스페인 사이의 이해관계가 마드리드 조약(1670)으로 막 조정되었기 때문에 모건의 파나마 점령은 양국 모두에게 좋지 않게 받아들여 졌다. 모건은 체포되어 영국으로 이송되었으나 양국의 분쟁이 재발하자 오히려 기사작위를 받고 자메이카 부총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상관들과 함께 버커니어를 소탕하려 했지만 충분한 해군력이 없어 이루어지지 못했다. 버커니어들이 최후로 벌인 대규모 활동은 1685년경 에드워드 데이비스, 존 이튼, 찰스 스완 등이 지휘하는 3,000명 가량의 병력이 자메이카를 공격했다가 실패한 사건이었다. 1689년 대동맹 전쟁이 벌어지자 이들은 각자의 조국을 위해 싸우는 합법적인 해적이 되었으며, 이에 따라 해적활동은 막을 내렸다.
[참조]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락지 기획팀 연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