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전래신앙을 총칭하는 말이다.
♣개요
무당, 만신의 축원의식으로 작두를 타고 있다
민간신앙·민속종교·고유신앙·토속종교·향토신앙·민중신앙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며 무속으로 통칭된다. 보다 좁은 의미에서의 무속은 무당과 관계된 종교현상을 말한다. 정작 '무속'이란 명칭 자체는 근대로 접어들면서부터 쓰이기 시작해 무당과 관련된 습속으로 취급되었다.
♣무의 개념
〈주자어류 朱子語類〉에는 무(巫)란 "신명(神明)을 다해 춤추는 사람이다"라고 되어 있다. 한자 '巫'자의 '工' 양변에 있는 '人'자는 춤추는 모양을 취한 것이니 무당이 신에게 의탁하기 위해 가무를 필요로 한 것이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五州衍文長箋散稿〉에서는 "지금 우리 고을에 여무(女巫)와 남격이 둥둥 북을 치며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고 덩실덩실 춤을 춘다 했는데, 이는 귀(鬼)를 쫓고 신을 내리는 것을 일컫는다"고 했다.
원래 무당은 여무를 지칭하며 만신(萬神)이라고도 부른다. 남무(男巫)는 박수·박사(博士)라 부르는데, 이것은 주역박사(周易博士)·다지박사(多智博士) 등에서 비롯되었다. 또 남무를 화랭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신라의 화랑(花郞)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밖에 광대·우인(優人)·재인(才人) 등도 무당을 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무당들이 천한 일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던 탓이다. 중세사회에서 무당들은 8천(八賤)의 하나로 규정되어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신분에 속했다. 무당은 입무(入巫) 형태에 따라 단골무당과 강신무당으로 나눌 수 있다. 단골무는 곧 세습무로서 모계세습 형태로 전승된다. 강신무는 신내림을 통해 무당이 되며 신의 영력으로 굿을 집행한다. 어떤 경우에도 무당이 되려면 일정한 학습과정을 거쳐야 했다. 신어머니라고 불리는 사람의 조무(助巫) 역할을 하면서 상당 기간 노래와 춤을 비롯한 여타 의례를 배운 후에 독립된 무당이 된다.
♣종교적 특성
첫째, 자연신앙으로서 한국 민간신앙의 전형을 이룬다. 따라서 교조(敎祖)·교리(敎理)·의례·교단(敎壇)과 같은 체계적인 종교형식을 갖추지 않고 있다. 현세구복적(現世求福的)인 신앙으로 인간의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욕구, 즉 생존과 후사에 대한 현실적인 이해관계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구복적 동기만 맞으면 사회윤리나 합리적 사고에 관계없이 어떠한 신앙형식도 수용·변화시킨다. 둘째, 현세구복적 동기를 성취하기 위해 주술적 방법을 사용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무속을 주술종교라고 한다. 무속을 믿는 사람들은 복잡한 사고과정을 치르거나 모호한 상징성을 많이 사용하기보다는 의례효과를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주술을 행함으로써 그 효과가 당장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셋째, 다양한 신앙형식이 융합되어 중층적인 신앙현상군을 이루고 있다.
즉 무속은 외래종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한민족의 생활 속에서 자리잡아왔으며 외래종교들이 유입되자 무속과 융합을 이루기 시작했다. 신라시대에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가 공인되었다는 기록은 그만큼 전래 무속과 새로 유입된 종교가 갈등을 빚었음을 말해준다. 불교·유교·도교는 여러 가지 면에서 무속과 하나가 되었다. 절에 자리잡은 칠성각(七星閣)·산신각(山神閣)·삼성각(三聖閣)·삼불제석(三佛帝釋) 등은 불교와 민간의 무속이 융합한 대표적인 예이다. 칠성신앙·남강노인 등은 도교적인 요소와 결합된 결과이다. 당산제와 당산굿, 서낭제와 서낭굿 같이 제(祭)와 굿이 같은 의미로 쓰이는 것은 무속의례와 유교의 제가 혼용된 결과이다. 넷째, 무속은 의례 중심의 종교이다. 집안신앙이나 마을신앙 등은 모두 굿이라는 의례를 통하여 구체화된다. 다섯째, 무속의 전승 주체는 지역사회이다. 민간신앙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보편적으로 존재하지만 각 지역사회의 지역적 특수성을 반영하고 있다. 무가의 본풀이가 역사적인 것을 표현해 공동체 성원의 삶의 내력들을 신화로서 전승하고 있음은 바로 지역성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참조]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락지 기획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