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에 있었던 일이라고 전해진다. 천상 옥황상제의 부인께서 오랫동안 중병으로 신음하셨다.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약초는 오직 지상에 구해야 하기에 그는 딸에게 지상으로 내려가 약초를 구해오기를 명했다. 지상으로 내려온 딸이 약초를 구해 천상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옥황상제가 늦게 돌아온 그녀를 책망하여 이번엔 지상으로 귀양 보내게 됐다. 그래서 그녀가 슬픔을 안은 채 무지개다리를 타고 내려온 곳이 수봉산(秀峯山) 계곡의 폭포가 쏟는 반석 위였다. 그래서 이곳을 지금도 무지개도랑(虹溪)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그녀는 울창한 숲을 헤쳐 인가를 찾아 계곡을 오르니 멀지 않는 곳에 서너 채의 초가가 있어 찾아든 곳이 지금의 구연화였다. 그녀는 다시 여기서 등너머의 큰 마을인 연당으로 옮겨와 남의 일을 도우며 기식하게 되니 모두들 연화에서 넘어온 색시라 하여 ‘연화각시’라 부르게 됐다. 마을사람들이 처음에는 연화각시를 의심과 멸시로 대했으나 점차 호감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본시 천상 선녀라 얼굴이 맑고 아름다우며 언행이 바르고, 더구나 인간의 길흉화복을 점치며 질병을 치유하는 신비로운 능력을 나타내므로 도리어 사람들은 그녀를 존경하여 다투어 맞이해 같이 살기를 원했다.
세월은 흘러 3년이 지난 어느 날 옥황상제께서 지상으로 내려간 따님이 어려운 고초를 겪으면서도 인간에게 은덕을 베풀기에 감동하여 귀양에서 풀고 천상으로 돌아오기를 허락했다. 연화각시는 이별을 아쉬워하는 동민들에게 " 저는 이제 여러분과 헤어질 때가 됐습니다. 그 동안 베풀어주신 은혜 감사합니다. 그런데 외람 되게도 한가지 드릴 말씀이 있으니, 그것은 내 몸 하나 거처할 수 있는 동굴을 파서 그 안에 약간의 식량과 물을 넣어 주십시오." 동민들도 이젠 승천하게 되는 선녀 연화각시와의 슬픈 이별의 아픔을 참고 그녀의 원대로 그녀가 하강했던 무지개도랑에서 1㎞쯤 윗쪽 수봉산 서쪽 기슭에 토굴을 만들었다.
그녀는 그 토굴로 들어가면서 "내가 들어가면 곧 입구를 돌로 막고 여기서 흐르는 뜨물이 그치면 상천한 줄 아십시오." 하고는 자신이 여태까지 입었던 잠자리 날개같이 얇고 가벼운 그리고 그 변치 않는 고운 색깔의 천의(天衣)인 열 두 폭 치마에서 두 폭을 잘라내어 마을 노장(老長)께 드리면서 이것은 여러분께서 어려울 때 도움이 될 것이니 그때 사용하십시오. 하고는 몸을 감추었다. 이곳이 현재도 연화각시 무덤으로 또렷이 남아 전한다. 동민들은 곧 사당을 지어 그 치마 한 폭은 거기에 모셨다.
그후 3년이 지난 해에 마침 수봉산 기슭에 연화사(蓮華寺)란 절을 짓게 됐는데, 그 대웅전 대들보가 될 수백년 된 칡등걸이 크고 굵어서 인력으로는 움직일 수 없었다. 승려의 동민들은 실의에 잠겼다. 그런데 "이것은 여러분이 어려울 때 도움이 되리라." 하고 그녀가 남긴 치마폭이 생각났다. 그래서 그 사당에 모신 치마폭을 장대에 매달고 대들보 위에서 흔들었더니 그 대들보는 나무토막처럼 가볍게 옮길 수 있었다.
어느 해인가 마을 앞 넓은 들판의 농작물에 병충해가 심했기에 이 깃발을 나부꼈더니 깃발이 미치는 들판은 씻은 듯 병충이 사라지고 풍년을 누리게 됐다. 그래서 대풍을 맞은 연당에서는 그해 농사를 다 지어놓고 추수를 앞둔 한가할 때 온 마을이 한데 어우러져 풍년에 감사하는 축제를 올렸다고 한다. 이러하니 이웃 들녘마을에서도 이 치마폭을 빌려가기를 원했으나 연당에서는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이웃마을의 심술궂은 사람들이 겨울의 어느 날 밤 사당의 치마폭을 훔쳐내어 불사르려고 하는데 갑자기 일진광풍이 휘몰아쳐 그 치마폭은 하늘 높이 날아가 버렸다. 연당마을 사람들이 방방곡곡 찾은 끝에 그 천의(天衣)의 치마폭이 방골재와 화왕산을 넘어 옥천마을 서낭기에 걸렸음을 알았으나 옥천에서는 ‘이는 하늘의 뜻’이라 하여 되돌려 주지 않았다. 그래서 연당에서도 노장께서 간직했던 그 한 폭을 역시 서낭깃대에 높이 매달았다. 그리하여 남쪽의 옥천 서낭기를 ‘수(男)서낭’이라 하고, 북쪽의 연당 것을 ‘암(女)서낭’이라 부르게 됐다. 그런데 이 기폭들이 나부끼는 곳마다 천재(天災)와 병충이 없어지니 이젠 온 고을이 풍년의 혜택을 받고 온 군민이 동참하여 감사하고 협력하는 즐거운 축제가 되도록 지혜를 모았다. 그래서 추수가 끝나면 겨울동안에 짚을 모아 마을마다 줄을 드리고 정원 보름날까지는 남북이 각기 각 마을에서 메고 온 줄을 한데 엮으니, 남쪽 수줄과 북쪽 암줄은 시장 중앙에서 머리를 맞대고 그 꼬리는 술정탑에 이르렀으며 한편은 지금의 명덕초등학교까지 뻗쳤다.
줄을 당기는 날이 되면 옥천과 연당은 서낭기를 앞세우고 풍물을 울리면서 창녕으로 향해오는데 그 연변마을 서낭기들은 이들 주장기를 예로써 맞이하고 또 뒤따른다. 북쪽의 대행열이 향교 뒤의 서낭고개를 넘어오면 옥천 서낭기가 이를 맞아 어루게 된다. 그러면 연당 서낭기는 수줍은 듯 숲골길을 통해 어머리들(魚頭野)을 질러 원촌 매산 앞 강변까지 달아나곤 했다. 이 행위는 바로 깃발이 미치는 곳마다 풍년이 들게 하는 동작이다.
줄다리기는 밤에 이뤄지는데 여기서 암숫줄을 잇는 행위를 ‘줄목걸기’ 또는 ‘비녀지르기’라 하여 밝은 낮이 아닌 그것도 달이 뜨기 전 어두울 때를 택하니 대개 정월 열 여드렛날에서 스무 하룻날에 행했다고 한다. 이는 곧 ‘농사가 생산의 대본’이요 생산은 ‘음양의 결합이 기본’인 까닭이다. 그래서 어두운 밤 횃불 아래서 자웅상합의 조작(繰作)으로 어렵게 목걸기가 이루어진다. 지금껏 고려 때 무덤의 특징을 갖춘 말무덤(斗塚)이 있고, 백중(百中)날이면 그 누구에서인지 깨끗이 벌초가 된 묘, 그녀의 신비로운 영험을 받으려고 무당굿이 성행했던 ‘굿마’라는 마을도 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