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북부(또는 프랑크 왕국)에 자리잡았던 바이킹족과 그들의 후예.
노르망디 공국을 세우고 원정을 나가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잉글랜드·웨일스·스코틀랜드·아일랜드 등을 정복하고 식민지로 만들었다.
노르만족(어원은 북쪽 사람이라는 뜻의 Nortmanni)은 원래 8세기 유럽 해안지방을 습격하여 파괴적인 약탈을 시작한 덴마크·노르웨이·아이슬란드 출신의 야만적인 이교도 해적들이었다. 9세기 후반에는 프랑스 북부 및 서부 연안을 점점 더 큰 규모로 자주 습격했고 900년경에 이르러 프랑크 왕국의 센 강 하류 유역에 항구적인 거점을 얻었다. 이미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습격에서 이름을 날린 롤로라는 이름의 바이킹이 주민들 사이에서 곧 뛰어난 지도자로 떠올랐다. 911년 프랑크 왕 샤를 3세는 롤로와 생클레르쉬르레프트 조약을 맺어 센 강 입구와 지금의 루앙 시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노르만족으로 알려지게 된 이들 바이킹족은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서쪽으로 노르망디 남쪽 지역까지 지배권을 넓혔다. 그뒤 11세기 중엽까지 노르망디에서의 노르만족 역사는 스스로를 백작이나 공작이라 일컫는 무자비하고 강력한 노르망디 통치자들이 노르웨이 지배계급뿐 아니라 프랑크 원주민에 대해 정치적 주도권을 잡기 위해 벌인 투쟁의 역사였다.
노르망디에 정착한 뒤 수십 년이 지나는 동안 그들은 결국 그리스도교로 개종했고 프랑스어를 쓰게 되었으며 프랑크 기병과의 싸움 때문에 해적일을 포기하게 되었으나 해적이었던 선조들의 특성 가운데 많은 것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앞뒤를 가리지 않고 매우 충동적으로 행동하고 거의 무모할 정도로 용감하게 싸우기를 좋아했으며 교활하고 잔인무도하게 배신행위를 했다. 유럽의 다른 부분으로 계속 팽창해 가는 동안 노르만족은 적은 수의 인원으로 몇 배나 되는 적을 쳐부수곤 하는 놀라운 무공을 세웠다. 땅과 바다에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신속하게 움직이는 능력, 잔인한 폭력의 행사, 돈의 가치와 사용에 대한 뛰어난 감각 등 이 모든 것들이 노르만족의 특성이었다.
모험을 좋아하는 노르만족은 노르망디에 정착한 뒤, 유럽에서 몇 차례의 큰 전투를 치루며 확장을 꾀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1066년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의 잉글랜드 침략으로, 현재 ' 노르만 정복'으로 알려져 있는 이 침략이 성공함으로써 윌리엄은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또한 11세기초 노르만족 모험가들은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로 오랫동안 천천히 이주하기 시작했는데 그곳에서 그 지방의 귀족들에게 용병으로 고용되어 아랍인·비잔틴인들과 싸웠다. 노르만족이 시칠리아에 점점 많아지자 그들은 이전의 고용주들에게서 땅을 빼앗아 작은 영역들을 만들었다. 이러한 노르만족 모험가들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은 탕크레드 드 오트빌의 아들들로, 그들은 1050년대에 이탈리아 남부 지역인 칼라브리아와 풀리아에서 지배력을 확립했으며 수십 년 뒤에는 시칠리아 전체를 지배했다. 12세기초 그들의 땅은 탕크레드의 손자인 루지에로 2세에 의해 합쳐져 시칠리아 왕국을 이루었고 시칠리아 왕국의 통치자들은 12세기말까지 노르만족의 기본적인 특징을 간직했다.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성격과 재빠르고 실속있게 모방·적응하는 능력이 그당시 사람들이 생각한 노르만족의 특징이었다. 그러한 특성 때문에 노르만족 국가가 탄생한 곳이면 어디에서나 자연도태 같은 과정을 거쳐 뛰어난 능력을 갖춘 무자비한 통치자 가문들이 나타났다. 그 시대 서유럽 세속군주들 가운데 안정되고 지속적인 정치제도를 만드는 데 가장 강력하고 성공적이었던 사람 중에는 노르망디·잉글랜드·시칠리아를 통치한 초기의 노르만족 지배자가 많았다.
노르만족의 모방과 적응 능력은 유럽 역사에 특히 중요했다. 그들은 약탈과 학살을 좋아하는 이교도 파괴자들로 출발했으나 카롤링거 왕조 및 카페 왕조와 교류를 하고 프랑스어와 그리스도교를 자신들의 언어와 종교로 받아들이게 되자 자신들이 공격했던 문명을 흡수해 재빨리 그 문명의 전파자로 변신했다. 또 카롤링거식 봉건주의 원리를 재빨리 받아들였기 때문에 노르망디는 11세기 서유럽에서 봉건화가 가장 앞선 지역이 되었다.
성을 쌓는 기술 또한 노르만족이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꼭대기에 목제 방책이 있고 도랑과 울타리를 갖춘 외벽(bailey)으로 둘러싸인 둑덕(motte) 형태의 단순하면서도 매우 실용적인 성을 쌓는 명장(名匠)들이 되었다 (→ 색인 : 언덕과 외벽의 성). 사방이 트인 지역에서 적은 기병부대로 전쟁을 치를 때 도움이 되는 이런 작은 요새들은 노르만족이 그 지역에 침투 또는 정복했다는 증거가 되었다. 또한 그들은 처음에는 말잔등 위에서 싸우는 것을 모방하던 초보자에 불과했지만 곧 당시 유럽 대륙에서 치르던 기마전의 명수가 되었다. 노르만의 기사들은 북서 유럽 전사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했던 무거운 갑옷을 입고 원뿔형 투구와 연 모양의 방패, 날이 넓적한 긴 칼과 가느다란 창으로 무장을 한 채, 그들의 적인 프랑크족이나 앙주·브르타뉴 지방의 사람들이 타던 말과 같은 종의 전투용 말을 타고 자신에게 맞서는 어떤 강력한 군대도 능히 무찌를 수 있다는 것을 많은 전투에서 증명해 보였다. 이것은 물론 노르만족 기사계급이 젊은 전사들의 훈련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덕분이기도 했다. 그들은 10세기와 11세기에 구(舊) 카롤링거 제국에서 발달한 기사의식을 부지런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노르만족 기사들은 고된 훈련을 받은 사납고 야만적인 전사들이어서 그들에게는 기사도 정신에 포함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 즉 자애나 자비의 감정이 파고들 여지가 없었다.
노르만족은 카롤링거식 봉건제도, 기병, 성에서의 전투 등에서와 같이 종교교리에서도 어느 정도 전형적인 대표자와 옹호자가 됐다. 노르망디 공작 가문의 후원 아래 노르망디의 종교생활이 꽃을 피워 많은 노르만인의 수도원들이 베네딕투스식 생활과 연구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는 주로 비(非) 노르만 학자와 개혁가들을 노르망디에 정착하도록 권장했기 때문이었다. 11세기 노르망디에서는 종교·교회가 크게 부흥했고 노르만인들 사이에서는 로마와 성지로 순례를 떠나는 것이 유행이 됐다. 순례에 대한 이러한 열광은 노르만인들이 남부 이탈리아를 정복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많은 노르만 귀족들이 종교심과 모험심, 새로운 정복에 대한 욕구가 뒤섞인 천진난만한 마음으로 지중해 지방을 여행했다. 그러나 12세기에 노르만 귀족들이 금방 사라지고만 안티오크 공국을 세운 것 외에는 초기 십자군에서 이렇다 할 역할을 한 것이 없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노르만족은 무엇이든 보기만 하면 재빨리 모방했는데 이러한 모방능력은 노르만족이 정착한 모든 나라들에서 증명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맹목적으로 모방하지는 않았고, 또한 모방만이 그들이 이룬 모든 것은 아니었다. 노르만족의 성공의 열쇠는 그들의 뛰어난 능력, 즉 새롭게 얻은 영토에서 발견한 제도를 자신의 목적에 맞게 응용할 수 있는 능력을 끝없는 자신감과 결합시킨 데 있었다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까운 설명일 것이다. 풀리아와 시칠리아에서 그들은 군사력의 우세를 믿고 성과 항구를 전략적으로 사용했으며 백작 또는 왕과 중신(重臣)들과의 관계를 확실히 하기 위해 봉건제도를 도입, 지배의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통치하는 데에는 동로마 제국 사람들과 이슬람교도들이 발전시켜 놓은 세련되고 앞선 기술들을 채택했다.
노르만족은 잉글랜드에도 노르만식 봉건제도를 비롯해 자신들 고유의 1인통치 방식과 재정제도를 가져갔지만 이미 있던 많은 제도와 관습도 받아들였다. 헨리 1세 통치 말기(1135)까지도 잉글랜드의 모든 국왕 통치구조는 근본적으로 앵글로색슨의 제도 그대로였다. 군주제, 국왕 자문회의, 옥새, 비서실, 주(州)제도와 주장관 그리고 매년 왕실 영토의 생산에 대한 현금 조세와 지주계급에게 부과하는 직접세의 2중조세제도 등 은 모두 노르만 정복 이전부터 내려오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는 노르만족이 회계국이나 순회판사, 재판에서의 맹세 등과 같이 많은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고 감독하게 됨으로써 1066년 이후 더욱 능률적이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며, 잉글랜드를 외국의 침략으로부터 안전하게 만들었다는 점도 역시 중요하다. 또한 노르만족은 잉글랜드의 교회에 영향을 미쳐 교회가 더욱 잘 조직되고 규율이 잡힐 수 있도록 했다. 한마디로 11세기와 12세기 유럽에서 노르만족은 강렬한 힘과 모험심으로써 중앙집권적인 통치관례와 봉건제도, 기병전, 종교적인 개혁 등을 확대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참조]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락지 기획팀 연재] |